01 아나키즘 논문 박정희 박사
단주 유림의 독립운동
김 희 곤 (안동대 사학과 교수)
1. 머리말
2. 성장과 국내 활동(1894~1919)
3. 1차 망명과 아나키즘 수용(1919~1926)
4. 신민부와의 연결 시도와 결별(1926~1929)
5.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 결성과 의성숙 경영(1929~1937)
6. 2차 망명과 임시정부 참여(1937~1945)
7. 맺음말
1. 머리말
인류의 역사는 이데올로기의 갈등과 극복과정이었다. 인간 세계를 운영해 나가는 방법들이 소수 엘리트들에 의해 창안되고, 그것에 역사대중의 에너지가 투입되면서 거대한 조류가 형성되며, 그 흐름이 얽히면서 역사의 물줄기를 이어왔다.
한국근현대의 사상사적인 골격도 역시 그러하다. 제국주의의 침략을 극복하기 위한 민족문제 해결 방안으로 다양한 방략이 논의되거나 실천에 옮겨졌고, 그럴 때마다 방법론을 둘러싸고 이데올로기적인 갈등과 극복노력이 나타났다. 그 가운데 가장 강하게 뿌리내린 것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 민족주의와 국제주의였다. 대체로 민족주의.자유민주주의.자본주의에 대하여 국제주의.인민민주주의.공산주의라는 대별되는 존재가 의식 속에 자리잡았다. 이처럼 흑백논리로 단순화된 사조가 뒷날 분단에 따른 냉전논리에 의해 더욱 강하게 만들어진 결과였다. 흑백논리가 강하게 뿌리를 내리다 보니 사실 중도론이나 제3의 길은 남북한을 가릴 것 없이 우리 역사에 존재하기 힘들었고, 그 이론에 대한 논의나 주도했던 인물에 대한 관심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여기서 다루게 되는 旦洲 柳林(1894~1961)은 이 땅에서 아나키즘이라는 제3의 길을 걸은 대표적인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해방 후 냉전구도로 인해 아나키스트들이 발붙일 공간이 별로 없기도 했지만, 일제강점기에도 이 노선을 선택한 인물은 비교적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유림은 바로 소수의 인물들이 민족문제와 인류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수가 택한 길을 걸은 인물이다.
본 발표는 일제강점기에 그가 걸은 행적을 추적하고 그 특성을 정리하는 데 목표를 둔다. 먼저 출신 가계와 성장과정 및 국내활동을 살피고, 이어서 1차 망명과 아나키즘을 접하는 과정, 성도대학 졸업과 만주지역의 활동 모색, 국내 잠입과 조선공산무정부주의연맹 결성, 학교경영, 피체와 옥중생활, 2차 망명과 임시정부 활동 등을 찾아내고 분석하려 한다.
2. 성장과 국내 활동(1894~1919)
旦洲는 1894년에 안동군 예안면 桂谷洞 542번지에서 중소지주인 아버지 (본관 전주)과 후처인 金性玉(본관 의성) 사이에 晩永 . 暾永의 두 형에 이어 삼남으로 태어났다. (단주가 태어난 시기에 대해서는 1893년 5월 23일(癸巳, 족보), 1894년 5월 23일(柳原植, <나의 아버지 柳林>, 《世代》 9권 3호, 1971, 244쪽; .독립유공자공훈록.5, 649쪽), 1898년(제적등본) 등 세 가지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는 아들이 쓴 기록을 따른다. 그리고 부모의 이름도 약간 엇갈리는 경우가 있지만, 족보와 제적등본을 따른다. 한편 그가 태어난 계곡동은 당시 臨北面 소속이었으나, 1934년에 月谷面으로 바뀌었다가, 현재 예안면에 속해 있다.)
그런데 두 형이 모두 양자로 출계하는 바람에 그는 홀로 남은 아들이 되었다. 즉 그의 백형 晩永은 백부 灝欽에게로, 중형 暾永은 재종숙 性欽에게로 각각 출계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아버지가 사망한 다음 해인 1900년에 그는 戶主를 승계하였고, (제적등본 참조. 그런데 그가 호주를 승계하였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즉 유일하게 남은 아들인 자신을 배제하고, 같은 문중에서 曦永을 양자로 받아들여 대를 잇게 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두고두고 유림의 인생 길에 중요한 문제로 자리잡게 된 것으로 보인다. ) 만 11세가 되던 1905년에 李蘭伊(고성 이씨)와 결혼하였다. (金在明, <柳林 先生의 憂國魂>, 《政經文化》, 1966년 1월호, 388쪽.)
그의 초명은 花宗이었는데, 아버지 사망 이후 10년이 지나 1919년 3월 6일자로 항렬에 맞추어 華永으로 개명하였다. (제적등본)
號가 月波, 별명은 柳林, 高尙眞이었으며,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11, 1976, 817쪽.]
1929년 11월 평양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를 다룬 《동아일보》 기사에는 柳華永이라는 본명만 사용되었다. 그런데 柳林이라는 이름은 1933년의 판결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그가 이미 1931년 10월에 체포되었으니 1930년을 전후하여 사용하기 시작한 이름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高尙眞이라는 이름은 성도대학에 유학할 때 관비생이 되기 위해 중국인 이름을 사용했다고 한다.(京城高法 판결문, 1933년 7월 6일))
또는 高자성이라는 이름도 사용되었다고 전한다. (鄭華岩은 유림이 ‘高자성’이라고도 불렸다고 증언했다.(李庭植, 金學俊,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民音社, 1988, 307쪽) 그런데 하기락은 1925~6년 경 대구 眞友聯盟과 관련된 上海의 高白性을 柳林이라고 표현하였다.(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韓國아나키즘運動史, 형설출판사, 1978, 222쪽; 하기락, 자기를 해방하려는 백성들의 의지, 신명, 1993, 141쪽) 이 고백성에 대해 高等警察要史, (朝鮮總督府 慶北警察部, 241쪽)는 경남 함안 출신이라고 적었다. 정화암이 ‘고자성’이라 증언한 것을 감안할 때, 만약 동일인이라면, 高等警察要史의 기록이 ‘自’를 ‘白’으로 오기한 것이고, 이것을 하기락이 그대로 옮긴 것이라 할 수 있다. 고백성이 방한상에게 편지를 보낸 때가 1926년 중반인 점으로 판단됨으로 시기적으로는 가능성이 있지만, 본적을 함안으로 기록한 점이나 유림이 방한상과 한 차례 만남도 없었다는 점에서 고백성과 고자성이 전혀 다른 사람일 가능성도 크다.)
그리고 대표적인 호가 旦洲인데, 언제부터 이를 사용했는지 알려지지 않는다. 1933년의 판결문이나 중국에서 함께 활동한 인사들이 그를 月波로 부른 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단주는 나중에 사용된 것 같다.
그가 받은 교육은 家學으로부터 시작하여 신식교육으로 이어졌다. 우선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운 그는 서당 교육을 받았는데, 9세에 사서삼경을 배웠다. (柳原植, <나의 아버지 柳林>, 《世代》 9권 3호, 1971, 244쪽.)
그러다가 경북북부지역에서 최초로 설립된 신식중등학교인 協東學校를 다녔다. 과연 그가 이 학교를 언제 다녔는지 확실하지는 않다. 이 학교가 1907년에 개교하여 1회생이 1911년 3월에 졸업했고, 柳林이 다닌 시기가 1910년 무렵으로 전해지는 만큼, 그가 1회생이었을 것이다. (柳林이 협동학교 출신이라는 기록은 모두 후대의 것이다.(柳原植, 앞의 글, 245쪽; 宋志香, 安東鄕土誌 下, 大成文化社, 1983, 541쪽; 韓國民族運動硏究所,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 1971, 705쪽) 유원식은 그의 아버지가 柳寅植의 지도를 받았다고 기술하였는데, 그렇다면 그가 1회생 아니면 3회생인데, 유림이 1915년에 이미 대구를 오르내리며 사회활동을 시작한 점으로 보아 1회생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東山 柳寅植?一松 金東三을 비롯한 설립 주역들과 신민회의 李觀稙이 핵심을 이루던 시기에 학교를 다닌 것이다.
柳寅植이나 金東三은 인생 행로를 결정짓게 만든 스승이었고, 그 영향 아래 그는 장차 망명과 독립운동이라는 ‘앞길’의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경북북부지역 계몽운동의 물꼬를 튼 협동학교는 안동의 척사적인 전통 유림사회를 통째로 뒤흔들어 놓았고, 유인식은 김동삼과 더불어 바로 그 선두에 서 있었다. (김희곤, 東山 柳寅植의 생애와 독립운동, 《한국근현대사연구》7, 1997, 49~50쪽.)
특히 유인식은 柳林의 4종질이었으나, 나이와 학문에서 유인식은 그의 큰 스승이었다. 동산은 안동지역의 근대화를 이끌어낸 인물이면서, 성장과정에서 단주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다. 그 아래에서, 또 유인식이 중심이 된 협동학교에서 그는 서양문화를 접하는 첫 걸음을 맞았다. 1907년에 시작된 이 학교가 외국지지, 화학, 생물 등 서양문화를 교과과정으로 담아냈기 때문이다.
유림이 독립운동에 첫 발을 내디딘 ‘거사’가 있던 시기가 1910년, 일제에 나라를 잃던 때였다. 국치의 소식을 접한 그가 ‘忠君愛國’이라고 ‘斷指血書’했다는 것이다. (朝鮮日報 1960.4.5; 柳原植, 앞의 글, 244~245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협동학교 1회생으로 졸업을 한 학기 앞둔 3학년 가을에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썼다는 말이 된다. 이러한 그의 거사에 협동학교를 통한 민족의식 고취가 주요하게 작용했으리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겠다. 또 한편으로는 당시 안동 유림사회의 분위기도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국치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안동에서는 지도자들이 자정 순국의 길을 택하고 있었다. 국치 직후에 禮安 의병장을 지낸 響山 李晩燾가 24일 동안 단식하여 순국했고, 이어서 그의 삼종질인 李中彦도 뒤를 따랐으며, 柳道發?權龍河?李鉉燮?金澤鎭 등이 자결하였다. 이런 안동지역의 극단적인 저항 분위기는 그로 하여금 혈서를 쓰는 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단주가 계몽교육을 받고서 졸업하기 직전에 다수의 스승들이 만주로 망명길에 올랐다. 자신이 살던 집을 학교에 기부하였던 白河 金大洛과 그의 아들 衡植, 조카 김동삼 형제 등 의성김씨 집안, 石洲 李相龍이 이끄는 고성 이씨 집안 등이 먼저 출발하고, 유인식도 뒤를 따랐다. 이 상황에서 그는 국내에서 투쟁의 길을 찾았다. 자료가 자세하지 않아 확실한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일단 1911년 협동학교 졸업 이후 1919년 3?1운동에 이르기까지 그가 대구와 안동을 오가면서 계몽운동이나 비밀결사 조직에 나선 사실이 전해지고 있다. 이 가운데 그 이름이나마 전해지는 조직으로는 안동 혹은 대구에서 鄭振鐸(혹은 澤)과 조직했다는 復興會와 대구에서 金容河와 함께 조직한 自彊會(혹은 自强會) 등이 있었다. 이들 단체가 구체적으로 어떠한 활동을 벌였는지, 혹은 단주의 역할이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그가 이러한 활동 과정에서 1915년에 일제 경찰에 구금되기도 했다는 정도만 알려지고 있다. (金在明, 앞의 글, 389쪽.)
대체로 구국계몽운동 차원의 비밀조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들 柳原植은 이외에도 광복회에도 가담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확실한 근거가 없다.(柳原植, 앞의 글, 245쪽) 안동에서 부흥회를, 대구에서 자강회를 조직하다가 경찰에 검거되었다는 설명도 보인다.(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265쪽))
旦洲가 다음 단계로 3·1운동에 참여한 사실이 전해진다. 그가 참여했다는 시위는 경북에서도 강력한 투쟁양상을 보인 안동의 臨東面 鞭巷 장터에서 벌어진 것이었다. (旦洲柳林先生紀念事業會, 旦洲 柳林 資料集1, 1991, 243쪽.
임동면 편항의 3·1운동은 경상북도 지역에서 전개된 시위 가운데 가장 격렬한 양상을 보였다. 柳致明의 증손인 柳東耆, 유림의 생장지인 계곡동의 柳淵成, 협동학교의 柳東泰와 李均鎬 등이 활동을 보인 이 지역의 시위는 3월 15일부터 준비가 본격화되었고, 장날인 3월 21일에서 22일 새벽까지 1,000~1,500명이 모여 임동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완전히 파괴하였다. 이로 인하여 58명이나 되는 인원이 재판에 회부되었다.(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3, 1971, 405~410쪽))
이 시위는시작되자마자 바로 면사무소와 경찰주재소를 부수고 일제 경찰로부터 무기를 빼앗아 우물에 쳐 박아 버리는 격렬한 양상을 보였고, 그래서 이 시위 주동자들은 7년형과 6년형을 받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 시위에는 단주가 졸업했던 협동학교 생도들이 주도적으로 참가하였는데, (협동학교는 이 시위로 인하여 다시 문을 열지 못하고 폐교되었다.) 단주도 이 시위에 동참하였다.
3·1운동을 겪자마자, 그는 망명을 준비하였다. 그가 만주 망명을 작정한 데에는 국내활동이 어렵다는 판단과 스승과 선배들의 동향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우선 가산을 대부분 정리한 뒤, 그는 모친과 아내, 그리고 만 네 살이 된 아들 原植과 함께 만주로 향했다. (金在明, 앞의 글, 389쪽.)
3. 1차 망명과 아나키즘 수용(1919~1926)
1) 1차 망명과 봉천, 상해, 북경지역의 활동
단주는 1919년(25세)에 낯설고 물 설은 奉天省 遼中縣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잠시 머물던 단주는 가족들을 그곳에 남겨둔 채로 1919년 말에서 1920년 초 사이에 남만주 柳河縣 三源浦로 이동하였다. (柳原植, 앞의 글, 246쪽.)
그곳에는 이미 1911년에 망명한 이상룡과 김동삼 등 안동 출신의 스승과 선배들이 李會榮을 비롯한 신민회 계열 인물들과 주축을 이루어 경학사, 신흥강습소, 백서농장, 부민단, 西路軍政署로 이어지는 항일조직을 결성하고, 또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여기에 합류하던 무렵에 단주는 자금의 필요를 느껴 국내에 남아 있던 나머지 재산도 모두 매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단주는 서로군정서에서 활동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그곳을 떠났다. 경신참변이 막 펼쳐지려는 단계에 그곳을 떠난 것이다. 그가 만주에서 중국관내지역으로 이동한 시기에 대해 대개 1920년 말이나 1921년 초라는 설이 전해져 왔다. 게다가 북경에 도착하여 丹齋 申采浩와 心山 金昌淑을 만나 그들의 영향 아래 활동했고, 단재가 주력을 기울이고 있던 《天鼓》 발행을 도왔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단주가 1920년 여름에 上海에 도착했다는 자료가 남아 있어서, 그의 이동 시기가 1920년 여름임을 알게 해준다. 즉 만주로 망명했다가 귀국해서 활동하고 있던 柳寅植에게 김창숙이 보낸 편지가 있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華永이 지난 여름에 유학차 江南으로 와서 마침 입학할 수 있게 되어 등교 날짜를 기다리다가 이상한 병에 걸려 上海公立醫療院에 2~3개월 입원하고 있으나 수술이 필요하다. 밀린 병원비와 치료에 필요한 금액이 400원인데, 어느 학우 한 사람이 100여 원을 마련하여 약간의 병원비를 치렀지만, 태부족이다. 돈을 청하는 글을 보낸 적이 있는데 어찌하여 답이 없는가? 또 奉垣의 본가(만주에 모친과 아내, 아들이 사는 집을 의미할 듯; 필자 주)와도 연락하였으나 지난 해 흉작으로 돌볼 수 없다고 한다. (1920년 정월 14일(양력 2월 25일)에 쓴 이 편지의 봉투에 국내 소인이 3월 2일자로 찍혀 있는 점으로 보아 이 달 초에 도착했을 것이다. 그리고 편지 끝에 단주가 입원해 있다는 곳의 주소를 적었는데, 上海市 上海公立醫院 三樓 三十二號였다.(柳寅植의 손자 柳基元 소장)
이 편지는 問喪하는 글로 위장되었다. 봉투 뒷면에 발신자 金星文(김창숙; 필자주)을 쓰고, 앞면에 수신자란에 ‘柳寅植先生孝廬’라 썼는데, ‘효려’라는 말은 喪主에게 보내는 글이므로 유인식의 부친 西坡 柳必永이 죽었다는 말이고, 그래서 내용도 西坡의 죽음을 애도하는 글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柳必永은 이 보다 근 5년이나 지나 1924년 11월 28일에 사망하여 儒林葬이 치러졌다. 또 만약에 진정으로 잘못 알고 문상하는 글이라면 실제 애도의 글이 훨씬 더 많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글 전체의 7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문상하는 글로 위장한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400원이라는 금액이 너무 많은 것 같다. 1926년에 제2차 유림단의거가 일어났을 때, 김창숙을 지원했던 영남 유림들이 땅을 팔아 많이 내놓았을 때 300~400원에 지나지 않았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많은 금액이라 여겨진다. 그렇게 보면 실제로 유림이 중병으로 입원한 사실조차 의심이 가고, 오히려 활동자금을 부쳐 달라는 요구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 편지 내용을 그대로 따른다면 유림은 1920년 여름에 유학을 위해 상해로 갔고, 그곳에서 머물다가 늦가을이나 초겨울부터 병이 들었다고 정리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알려진 것처럼 만주를 떠난 시기만이 아니라 북경과 상해에서 그가 남긴 자취에도 엇갈리는 부분이 있다고 봐야겠다. 그가 1921년에 북경에서 신채호의 《天鼓》 발간을 도왔다거나 상해에서 新韓靑年黨에 가입하여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旦洲柳林先生記念事業會, 앞의 책, 262~203쪽.
신한청년당에 대해서는 김희곤, 中國關內 韓國獨立運動團體硏究, 지식산업사, 1995, 74~113쪽 참조.)
이 전언을 편지와 연결시켜 보면, 그가 먼저 상해로 가서 신한청년당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북경으로 옮겨 신채호를 도왔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만약 그가 상해가 아닌 북경에서 먼저 활약했다면, 당시 反臨時政府 핵심세력으로 자리잡고 있던 단재의 영향 때문에 친임시정부 성향이던 신한청년당에 가입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창숙은 1919년 여름부터 1년 동안 광주에서 활동하다가 1920년 8월에 상해에 돌아왔고, 1920년 11월에 북경, 1921년 정월을 전후하여 상해, 1921년 2월 이후에 북경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國譯心山遺稿刊行委員會, 國譯 心山遺稿,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79, 715~736쪽.)
그러므로 유림이 신채호를 만난 곳은 북경이지만, 김창숙을 만난 곳은 북경이거나 상해일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天鼓》가 창간된 시기는 1921년 1월이었으므로, (李浩龍, 한국인의 아나키즘 受容과 展開,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2000, 80쪽.
김창숙이 1920년 11월에 북경에 갔는데, 단재가 《天鼓》를 경영하고 있었다고 썼다. 그렇다고 해서 바로 그 11월에 그것을 경영했다는 의미는 아닐 것 같다. 앞뒤의 글 내용을 보면 11월에 상해에서 북경에 들렀다가 다시 상해로 간 연말 사이에 잡지사가 경영되고 있었다는 의미인 것 같다. 그렇다면 1920년 말에 창간호를 준비하고 있던 장면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고, 그 결과 1921년 1월에 창간호가 나왔을 것이다.)
유림이 상해공립의원에 입원하고 있던 무렵이다. 실제 대수술이 요구되는 큰 병으로 입원한 것인지는 모르나, 일단 이 편지는 유림이 김창숙을 가까이에서 만나고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사실만은 확인시켜 주고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널리 알려진 대로 유림이 북경에서 신채호가 발간하던 《天鼓》 간행을 도왔다면, 1921년에 상해에서 다시 북경으로 이동하였다는 말이 된다. 이 무렵 한창 아나키스트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던 신채호로부터 유림 자신도 아나키즘을 접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신채호는 1921년 북경에서 독자적인 아나키즘 조직을 결성하였는데, 黑色靑年同盟 北京支部가 그것이다. 이로써 중국에서 한국인의 독자적이고 조직적인 아나키스트운동이 가능해졌다.(李浩龍, 앞의 글, 88쪽))
그러므로 유림이 아나키즘에 접하기 시작한 곳이 북경이요, 시기가 대체로 1921년부터 1년 남짓하며, 그 창구가 신채호라고 생각된다. 특히 뒷날 법정에서 변호인이 유림의 성도 유학에 대하여 “무정부주의를 가진 이래 종전의 知友들과의 관계를 끊고”라는 변론한 점은 그가 북경에서 아나키즘을 수용하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京城高法 판결문(1933.7.6))
여기에다가 해방 이후 ‘不義라면 父子 天倫 사이에도 容納하지 않던’ (趙東杰, 旦洲先生 30周忌 追悼辭, 旦洲柳林先生紀念事業會, 앞의 책, 245쪽.
이 말은 단주가 홀로 각처를 돌며 독립운동을 하던 시기에 아들 원식이 만주에서 어머니와 둘이 지내면서 일본군 장교가 되었기에, 해방 후 1961년 4월에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도 처와 아들을 상면하지 않고 홀로 살았던 일을 의미한다.)
강직하고 꼿꼿한 기질도 바로 단재와 심산의 영향을 통해 형성된 것 같다.
2) 성도대학 유학과 활동방향 모색
상해와 북경에서 활동하던 유림이 당초 목표로 정한 수학의 길을 찾아 나섰다. (유림이 1922년에 상해 대한적십자회에 가담했다거나 부회장을 맡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지지만 실제 자료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아나키즘을 받아들인 그가 학문적 성숙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고, 여기에 단재의 동의도 있지 않았을까 추정해 본다. 학교는 내륙 깊숙한 곳인 四川省의 省都인 成都에 자리잡은 成都大學으로 정했다. (학교 이름이 명확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유림과 가까웠던 鄭華岩도 “성도대학인가 성도사범대학인가에 재학하고 있어서”라고 회고했다.(이정식?김학준, ?혁명가들의 항일회상?, 민음사, 1988, 307쪽) 그가 사범대학을 다닌 것만은 확실하다. 그의 판결문에는 성도로 유학간 사실과 사범대학 영문과를 다닌 내용이 각각 기록되어 있다.(?京城高法 판결문?, 1933.7.6))
왜 그가 당시로서는 한인 학생들이 거의 선택하지 않았던 오지의 대학을 선택했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다. 그곳에 아나키즘이 발달한 것인지, 아니면 변호인의 주장처럼 “무정부주의를 가진 이래 종전의 知友들과의 관계를 끊고”, “학문연구에 전념하기” 위한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떤 경우이든 그가 단재의 동의와 중국인의 협조를 받아 유학 길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일단 대학에 진학했던 이유가 “지속적인 ‘실천’을 위해서는 확고한 ‘이론’이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점을 절실히 깨달은 듯 하고, 또한 국권 회복이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이상, 젊은 시절에 이념적인 토대를 보다 절실히 다질 필요를 느꼈던” (金在明, 앞의 글, 390쪽.)
데에 연유한 것 같다.
유학을 위해서 그가 가장 큰 먼저 풀어야 할 과제는 학비 문제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官費生이 되기로 작정하고, 중국인으로 행세해야만 했던 모양이다. “중국의 학교에 관비생으로서 수학하기 위해 이름을 高尙眞으로 개명”했다는 기록이 그것을 말해준다. (京城高法 판결문(1933.7.6))
그는 사범대학에서 영문과를 다녔고, 그러면서 졸업한 뒤에 프랑스로 유학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이를 위해 그는 프랑스어를 ‘選修’하였고, 勤儉工學會의 알선으로 유학에 따른 手續을 하고, 학자금은 중국인 陳夢軒?胡素民이 부담하는 외에 중국정부의 보조도 받는 등 유학을 준비해나갔다고 한다. (京城高法 판결문(1933.7.6))
그가 나중에 영어만이 아니라 여러 외국어에 능통한 인물로 널리 알려지고, 또 에스페란토에도 능숙했다는데, (조선일보, 1960년 4월 5일자.)
영문학을 전공하고 프랑스어를 선택 이수하며 다양한 외국어를 익힌 유학시절의 노력을 짐작할 수 있겠다. 여기에다가 사상적으로도 성숙하여 상당한 이론으로 무장한 아나키스트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학하는 동안 북경을 중심으로 형성되고 있던 무정부주의자들의 결집체가 구성되었는데, 그는 자연히 여기에서 제외되는 아쉬움은 감수해야 했다. 즉 1924년 4월말 북경에서 李會榮, 李乙奎, 李丁奎, 白貞基, 柳子明, 鄭華岩 등이 결성한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 참여하지 못했던 것이다.
성도에서 대학을 졸업한 시기가 1926년 초로 알려진다. 1922년에 상해?북경을 떠난 그가 다시 상해에 나타난 시기가 1926년이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중국 내륙지역을 여행한 것으로 보인다. 자료에 따라서는 그가 “봉천으로 돌아와 아내 李蘭伊가 경영하던 여관에서 쉬다가 운동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광동, 상해, 남경, 무한 삼진 등을 여행하고, 그 과정에서 중국국민당 좌파인물들과 사귀고, 陳獨秀, 陳炯明, 蔡元培 등 민주사회주의자들과 접촉하였다”고 쓰고 있기도 하다. (최영주, <한국 아나키스트 群像>, 《政經文化》 1983년 9월호, 294쪽.)
그렇지만 그의 성격상 가족을 먼저 만나기 위해 곧장 봉천으로 갔을 것 같지는 않다. 是也 金宗鎭이 1926년에 武昌과 漢口에서 그를 만난 일, (李乙奎, , 是也 金宗鎭先生傳, 旦洲柳林先生紀念事業會, 앞의 책, 32쪽.)
졸업 후 상해로 자신을 찾아왔다는 정화암의 회고, (정화암 회고(이정식, 김학준, 앞의 책, 308쪽)
高等警察要史에 나오는 眞友聯盟 관련 高白性이란 인물이 유림이 사용한 ‘高자성’과 같은 인물이라면 상해에서 대구지역으로 서신을 보내 아나키즘운동의 촉진을 요구한 것도 역시 이 무렵일 것이다.)
1926년 겨울 奉天에서 그를 만난 權五惇이 그 시기를 ‘성도사범대학을 마치고 잠시 부인이 경영하던 여관에서 휴양하던 때’라고 표현하면서 그 후 “자신은 상해로 가고 유림은 東滿으로 갔다” (權五惇, 旦洲의 生涯와 思想, 旦洲柳林先生紀念事業會, 앞의 책, 148쪽.)
는 표현, 또 1927년 1월에 김종진이 길림에서 그를 만났다는 회고 등이 있는데, (李乙奎, 是也 金宗鎭先生傳, 旦洲柳林先生紀念事業會, 위의 책, 32쪽.)
이는 모두 그가 졸업 후 내륙을 여행하다가 상해와 북경으로 거쳐 봉천으로 돌아오는 길을 말해주는 것이다. 또 이 과정에서 그가 북경에 가서 金杜奉과 申采浩가 쓰고 있던 한글말본과 조선말본 저술에 도움을 주었다고도 전해진다. (김재명, 앞의 글, 390쪽.)
그가 중국 내륙지방을 돌면서 주요 인사만 만난 것이 아닌 것 같다. 1929년 10월경에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평양에 잠입하였다가 11월 11일에 체포되었는데, 당시 조사를 끝낸 일본 경찰은 그가 광동에서 활약한 대단한 인물로 평가하였다. 즉 “씨는 일찍 중국 사천성 국립사범대학을 졸업하고 廣東機械工人總同盟에서 十萬 工人을 지휘하던 인물이니 만큼, 七國語를 능통할 뿐 아니라 해박한 학식과 무정부주의에 철저한 수양이 있음으로” (《동아일보》 1929년 12월 11일자.
“3년 전까지도 광동에서 십만 중국노동자를 포용한 機械工人總同盟에서 활약하고”(《동아일보》 1929년 11월 27일자)라는 표현은 1926년에 광동에서 활동한 사실을 말해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라고 표현하였던 것이다. 물론 과장된 부분이 있겠지만, 일단 그가 광동에서 노동자들의 세계에 발을 딛고 이론을 실체화해 나가는 운동을 시도한 것만은 믿을 만하다. 그렇다면 국내에서 이제 이념으로 무장된 아나키스트요, 뛰어난 중국어를 구사하는 활동가로서 거침없이 중국대륙을 오르내리기 시작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4. 新民府와의 연결 시도와 결별(1926~1929)
봉천으로 돌아온 그는 1927년 1월 무렵 吉林에서 是也 金宗鎭을 만났다. 앞에서 본 것처럼 그는 이보다 앞서 武昌과 漢口에서 김종진을 만난 적이 있었는데, 김종진은 당시 길림에서 晦觀 李乙奎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이을규가 온다는 전제 아래 두 사람은 운동방향을 논의하였고, 그 결과 中東線을 활동의 중심지로 설정하였다. (旦洲柳林先生紀念事業會, 앞의 책, 32쪽.)
이것은 김좌진과 鄭信 등이 이끄는 신민부 군정파와의 연합을 강력히 원하고 있으면서, (박환, 滿洲韓人民族運動史硏究, 一潮閣, 1991, 213쪽.)
장차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1929.7 조직)의 결성을 주도하게 되는 是也 金宗鎭이 유림을 설득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림이 김종진의 제의를 흔쾌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그는 김좌진이 과연 자신의 의견에 동조할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었다. 이에 김종진은 김좌진이 인재부족을 절감하고 있으므로 의심한 여지가 없다고 강조하였고, 이 말에 따라 그는 활동 중심지를 일단 中東線 일대에 두자는 데 합의하였다. (李乙奎, 是也 金宗鎭先生傳, 旦洲柳林先生紀念事業會, 앞의 책, 32~33쪽.)
이는 곧 신민부에 가담하거나 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을규가 그곳에 도착하자, 그들 세 사람은 중동선으로 출발하였다. 敦化와 눈 덮인 鏡珀湖를 횡단하고, 東京城과 寧古塔을 거쳐 2개월만인 1927년 3월 하순에 목적지 중동선 海林驛에 도착하였다. 그러자 金夜運, 金夜逢, 李達, 李德載, 李鵬海, 嚴亨淳, 李俊根, 李康勳 등이 찾아왔고, 해림소학교에서 김좌진이 이들을 위한 환영회를 열었다. (李乙奎, 위의 글, 33~34쪽.)
신민부의 본부를 방문한 것이고, 또한 핵심세력들과의 만남이었다.
이후 유림은 김좌진과 여러 차례 토론을 벌였고, 그것은 격론으로 이어졌으며, 그 때마다 이을규가 조정역을 맡았다. 격론의 주요 골격은 당시 민족주의계와 공산주의계가 벌이고 있던 갈등을 해결하는 방향이었다. 유림은 김좌진에게 “사상은 사상으로라야 막을 수 있는 것이니까 공산주의에 대항하려면 그 사상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무정부주의로라야 막을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에 대하여 김좌진은 “주의는 주의로라야 대항할 수 있다고도 생각할 수 있으나 주의가 究極의 목적이 아니라 인간의 행복이요 동시에 우리 민족이 복되게 잘 살자는 것이 염원인 이상에야 그 목적을 위하여, 또 우리의 특수한 처지에 알맞은 이론을 세워야 할 것이지 꼭 남들이 주장하여 오는 무슨 주장이라야 될 것은 아니라”고 반론을 내세웠다. (李乙奎, 위의 책, 34~35쪽.)
당시 팽창하는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부분적 수용이나 접합을 염두에 두던 김좌진과는 달리, 단주는 단호하게 그것을 부정하고 나섰다. 이 때문에 몇 차례 격론이 벌어지다가 끝내 단주는 길림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단주가 김좌진과 의견합일을 이루지 못하고 떠나 온 데에는 공산주의를 비판하는 그의 주장도 있지만, 더구나 당시의 한인 아나키스트들은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연합을 비판하고 있던 점도 주목해야 할 일이다. 당시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민족해방과 식민지 권력과의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면서 새로운 지배권력을 꿈꾸는 자본가 계급과의 연합을 도저히 불가능한 것으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민족주의운동에 대한 비판은 민족통일전선 결성에 대한 반대로 이어졌고, 1920년대 말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 민족주의계열인 신민부와, 1930년대 초 상해연맹이 김구의 한인애국단과 합작할 때에도 여전히 부정적이었다. 김좌진과 결별하고 곧 이어 1929년 11월에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던 단주가 만났던 이홍근은 공산주의자들이 민족주의자들과 연합한 것이 오히려 노동자?농민운동의 성장을 가로막고 있을 뿐이라고 하면서, 민족주의자와의 연합에 반대하고 있었는데, (이호룡, 앞의 글, 113~115쪽.)
당시 아나키스트들의 성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5. 朝鮮共産無政府主義者聯盟 결성과 義誠塾 경영(1929~1937)
김좌진과의 논쟁에서 일단 합의점 도출에 실패한 그는 海林을 떠나 다시 正義府가 있던 길림성 華甸縣으로 돌아 왔다. 정의부는 ‘자유시 참변’ 이후에 이 지역에 재집결한 군사조직들이 統軍府(1923.6)?統義府(1923.8)?재만통일준비회(1924.7)를 거쳐 1925년 1월에 조직되었다. 그리고 핵심 인물 가운데에는 안동 출신 김동삼이 있었다. 그는 정의부에서 주로 교육관계의 일을 담당하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金在明, 앞의 책, 329쪽.)
1927년 11월에 趙擎韓이 상해를 출발하여 만주로 갔는데, 그 달에 華甸에 도착하여 柳華永을 만났다는 것이 바로 이 무렵이 아닌가 여겨진다. (趙擎韓, 白岡回顧錄(국외편), 한국종교협의회, 1979, 71쪽.)
따라서 그는 海林에서 7월에 조직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연맹에 가담하지 못했다.
華甸으로 돌아 온 단주는 국내의 아나키즘 운동에 커다란 관심을 가졌다. 1925년부터 조직된 국내의 아나키즘 운동은 1920년대 후반에 들어 전국 각지에 단체를 결성하고, 1929년 11월에 평양에서 全朝鮮黑色社會主義運動者大會를 준비하고 있었다. 崔甲龍이 중심이 된 關西黑友會가 준비를 맡았고, 《동아일보》 1929년 8월 8일 기사를 통해 11월 10~11일 이틀 동안 대회가 열린다는 사실을 보도되게 만들었다. (《동아일보》 1929년 8월 8일자; 박환,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의 결성 -崔甲龍의 사례를 중심으로-, 《國史館論叢》41, 1993, 221쪽.)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를 앞두고 각지로부터 40~50명이 평양에 모이던 중, 11월 7일부터 平壤, 大同 양 경찰서가 검거에 나섰고, 9일에는 대회 중지가 선언되었다. (《동아일보》 1929년 11월 11일자.)
그 틈에 유림도 7일 밤에 검거되고 말았고, (《동아일보》 1929년 11월 18일자.)
이홍근을 비롯한 주역들도 연이어 체포당했다. (《동아일보》 1929년 11월 17일자.)
유림은 연일 취조에 시달렸다. 신민부나 한족총연합회와의 관련성에 대해 취조 당했을 것이다. (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259쪽.)
이런 와중에 봉천에서 아내와 아들이 달려 왔고, 그는 腦病에 시달렸다. (《동아일보》 1929년 11월 27일자.)
그 장면을《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중국 광동 기계공인총동맹이라는 ‘생디칼리즘’운동의 맹장으로 있으면서 십만 공인을 지휘하던 류화영은 평양에서 개최될 예정이던 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에 참석코자 평양에 왔다가 29일간 유치처분을 받아 가지고 대동서의 취조를 받던 중인데, 대동서장의 말이나 고등과장의 말을 듣거나 오륙일 남은 기간을 지나면 유치장에서 나올 듯 싶다는데 아직까지 조선에 와서 특별한 실제운동을 한 형적은 없다하며 류화영은 유치장 안에서 腦病으로 신음중임으로 공의는 치료에 전력 중이라더라” (《동아일보》 1929년 12월 3일자.)
결국 일본 경찰은 엄밀한 조사를 벌였지만, 그에게서 아무런 혐의를 찾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워낙 거물인데다가 또 어떠한 영향을 줄지 모른다고 판단하고서 직접 대동경찰서의 형사를 동행시켜 유림과 그 가족을 봉천으로 추방시켰다. 이 사실을 당시 신문은 “해박한 학식과 무정부주의에 철저한 수양이 있음으로 취조하던 경관들도 매우 곤란하였다는데 취조하다가 국경 밖으로 추방한 것은 조선에서 드물게 보는 일이라더라”라고 보도할 정도였다. (《동아일보》 1929년 12월 11일자.
이 기사의 표제어는 “흑색운동계거물 柳華永 국외방축, 일곱 나라말을 능통코 박학다식에 최조하던 경관도 탄복을 말지 안해, 봉천까지 護送한후 放免“이었다. 이 기사는 경찰이 조사과정에서 유림을 대단한 인물로 평가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어 매우 흥미롭다.)
경찰이 그렇게 호송하여 방면했지만, 실제로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집요한 조사에도 불구하고 추적되지 않았던 사실이 2년 뒤 1931년에 원산에 터진 조그만 사건으로 인해 드러나게 되었는데, (아나키즘 계열의 원산청년회와 관제 노동조합인 함남노동회 사이에 노동운동의 주도권을 둘러싼 싸움이 벌어지자, 이를 수사하는 과정에서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 조직이 드러났다. 그래서 1931년 4월 1일 최갑룡(관서흑우회), 조중복(단천흑우회)이 원산경찰서에 압송, 이홍근, 강창기, 안봉연, 이순창 등 모두 8명이 체포되었다.(金在明, 앞의 글, 394쪽) 10월에 유림마저 검거됨으로써 2년 전에 평양에서 경찰의 심문을 따돌리며 조직했던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것이 바로 유림이 평양에서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했다는 사실이다. 즉 1929년 10월 23일 오후 2시경에 柳華永을 비롯하여 李弘根, 崔甲龍, 趙重福, 林中鶴 등이 평양의 기점리에 있는 송림에 모여 회합을 가지고, 11월 1일에 다시 그 자리에 모여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했다는 것이다. (조직 당시에 연맹이 아닌 동맹을 결성하려했다. 단순한 연합적인 성격보다는 특정이념을 배경으로 하여 무엇인가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집단을 만들고자 하였기 때문이었다.(최갑룡의 증언, 박환, 앞의 글, 226쪽에서 재인용))
여기에서 그들은 다음과 같은 강령을 결의하였다.
(1) 현재의 국가제도를 폐지하고, “코뮨”을 기초로 그 자유연합에 의한 사회조직으로
변혁할 것.
(2) 현재의 사유재산제도를 철폐하고, 지방 분산적 산업조직으로 개혁할 것.
(3) 현재의 계급적 민족적 차별을 철폐하고, 전 인류의 자유 평등 우애의 사회
건설을 기한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獨立運動史資料集 11, 1976, 818쪽.)
‘현재의 국가제도’를 폐지한다는 말에서 일제 타도의 의지를 표명하고, 또 자유연합에 기초한 무정부주의 사회 건설 의지를 천명하였다. 그리고 사유재산제도가 바탕이 되는 자본주의 사회를 거부하고 지방분권적인 산업조직을 추구하였다.
이어서 그들은 각 지역에 대한 활동을 분담했다. 단주는 만주 방면을, 이홍근과 최갑룡은 관서 방면을, 조중복과 임중학은 함북 방면을, 그리고 뒤에 가입하기로 되어 있던 金鼎熙와 車學輅(車鼓東)가 함남 방면을 각각 맡기로 했다. 또한 이들은 운동 방침을 결정하였다.
(1) 적색운동자와 대립적 항쟁을 하지 말 것.
(2) 농민 대중에 대한 운동을 진전시킬 것.
(3) 다른 민족적 단체에 가입하지 않을 것. (위와 같음.)
공산주의나 민족주의 모두와 거리를 둔다는 점을 분명히 하면서, 특히 공산주의자들과의 대립을 피한다는 자세를 확인하였다. 적색운동자와의 대립적 항쟁을 피하자는 이유는 큰 적과 싸움으로써 엉뚱한 힘의 소비만을 자초하게 된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것은 그들이 일찍이 원산지역에서 볼셰비키와 대립하다가 피해만 본 역사적 경험에서 나온 방침이었다. (박환, 앞의 글, 227쪽.)
경찰에 검거됨에 따라 더 이상 구체적인 움직임은 없어 보였지만, 주역들은 결성된 조직을 바탕으로 나름대로의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만주로 돌아 온 그가 구국교육을 통해 청년들을 육성하는 작업도 바로 그 차원에서 펼쳐진 것으로 이해된다. 1929년 11월에 국내의 광주에서 시작된 광주학생항쟁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이에 일제 경찰에 쫓긴 상당수의 학생들이 만주로 탈출해 오자, 1930년(36세) 말부터 이듬해에 체포될 때까지 단주는 4백 명이나 되는 학생을 수합하여 義誠塾(혹은 義誠學院, 봉천중학)을 창립했다. 이 학교는 중국의 각 학교 입학을 위한 예과 과정으로 오직 그의 부담으로 만들어졌다. (旦洲柳林先生紀念事業會, 앞의 책, 264쪽; 柳原植, 앞의 글, 246쪽.)
또 그는 한인 유학생의 중국학교 입학을 알선하면서, 직접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京城高法 판결문(1933.7.6))
그는 《동아일보》에도 그 사실을 알려 국내 학생을 모았다. 학생 모집 기사는 이틀에 걸쳐 상, 하로 나뉘어 게재되었다. (《동아일보》 1931년 4월 15~16일자.)
국내에서 진학하기 어려운 사정을 가진 학생들에게 만주 봉천에 설치된 학교로 오라는 권유인데, 겉으로는 중국학교라고 내세웠지만 학교 이름을 밝히지 않은 점으로 미루어 보아 사실상 자신이 경영하는 학교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1933년에 서대문감옥에서 작성된 그의 신원카드 주소와 학교 통신처 주소가 동일한 점, (통신처는 奉天省 遼寧 商埠地 22經路 367號 院內 301號이고, 내방처는 奉天 十間房遼東昌이었다.(신원카드, 판결문 및 《동아일보》1931년 4월 15~16일자))
초급중학부, 고등중학예비부, 초등중학예비부가 주된 과정이면서 특히 華文, 華語를 補習하는 것이 핵심이었다는 점에서, 柳林이 한국학생들을 중국학교에 편입학 시키기 위한 교육적 교두보로서 이 학교를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그의 활동은 평양에서 동지들과 논의한 활동의 구체적 실천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奉天 商埠地 2經路에 있는 중국 모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전기와 같은 계획을 진행하였다”라거나 “1929년 10월 평양에서 합의한대로 柳華永은 봉천에 있으면서 조선내의 주의자와 연락하면서 재만 주의자와 합류하여 조선공산무정부주의 동맹조직을 책동한 것”이라는 기사는 바로 동지들과의 약속을 이행하는 과정이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인 셈이다. (《동아일보》 1931년 10월 28일자.)
1929년 당시에는 초급중학과정이 중심이었으나, 1931년 무렵에는 고등중학과정으로 바뀐 것 같다. 1931년 10월에 체포되는 순간까지 유림이 이 교육사업에 몰두하였는데, 끝내 중국국민당좌파가 운영하는 대학예과수준의 平旦고급중학과 병합되었다고 한다. (유원식, 앞의 글, 246쪽.)
경영난이 가장 주된 이유인 듯 하다.
그런데 그는 1933년 판결을 받을 때, 이 활동을 국립사범대학 관비생으로서 졸업 이후 의무적으로 4년 이상 교육에 종사해야 하는 규약에 따른 활동이라고 내세웠다. (京城高法 판결문(1933.7.6))
그렇다면 졸업 이후 바로 교육사업을 벌여야 하는데, 3년도 훨씬 지나 이를 펼쳤다는 말은 의무적인 활동에 매여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이보다는 오히려 평양을 다녀 온 뒤, 즉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면서 약속했던 활동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는 편이 옳겠다. 南相沃이 유림과 함께 학원 경영에 참여하다가 원산으로 돌아와 원산노동운동에 참여한 점도 유림의 활동이 연맹 활동차원에서 전개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일면일 뿐만 아니라, 봉천과 국내 근거지를 연결하는 활동의 한 모습이라 생각된다. (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260~261쪽.)
의성숙 운영에 몰두하고 있던 유림은 1931년 9월 18일에 일본이 만주를 침공한 직후인 10월 초에 체포되었다. 그가 체포되기 반년이나 앞서, 이미 3월부터 시작된 경찰의 조사가 계속되었고, 결국 7월 29일에 李弘根, 최갑룡, 金鼎熙, 조중복, 林仲鶴, 姜昌璣, 盧好範, 南相沃이 원산검사국으로 송치되었으며, (《동아일보》 1931년 7월 31일자.)
金鼎熙, 이홍근, 최갑룡, 조중복, 姜昌璣, 林仲鶴 등 6명이 예심에 회부되었다. (《동아일보》 1931년 8월 8일자.)
그렇지만 그 때까지도 유림은 검거되지 않았다. 그가 검거된 시기는 1931년 10월 5~6일경이었고, 10월 7일자 신문에 그 사실이 바로 보도되었다.
“무정부주의자 거두 류화영 검거, 봉천 모 중학교교원”
“원산경찰서 高野 형사가 봉천으로 출장하여 검거” (《동아일보》 1931년 10월 7일자.
대개 검거 날짜를 10월 7일로 이해해 왔지만, 신문기사가 10월 7일이므로 이 보다는 하루 이틀 정도 앞선 시기라고 생각된다.)
그가 검거된 이유도 역시 조선공산무정부주의연맹을 조직하고 활동했다는 것이다. 원산경찰서 형사대에 의해 체포된 그는 원산 臥牛里 형무소에 수감되었다.(崔甲龍, 第30周忌 追慕祭에 즈음하여, 旦洲柳林紀念事業會, 앞의 책, 235쪽.)
그곳에서 취조 받던 그는 검거된 지 20일쯤 지난 1931년 10월 26일에 원산검사국에 송치되었다. 그런데 이후 예심은 지지부진하여 전혀 진척 없이 세월만 보내고 있었다. 그러자 그를 비롯한 동지들은 모두 단식 투쟁에 들어갔고 예심을 촉구하였고, (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261쪽, 崔甲龍, 第30周忌 追慕祭에 즈음하여, 旦洲柳林先生紀念事業會, 앞의 책, 235쪽.)
그 결과 ‘원산흑색사건’이라 붙은 제목으로 유화영, 이홍근, 최갑룡, 김정희, 임중학, 조중복, 강창기, 安鳳淵 등 8명이 함흥법원의 공판에 회부되었다. 1년이 훨씬 지난 1932년 12월 22일에 함흥지방법원으로 호송된 것이다. (《동아일보》 1932년 12월 23일자.)
그러나 그 다음 재판과정도 느리게 진행되었다. 예심 이후 넉 달이나 지난 1933년 3월 17일에야 비로소 공판이 열리고, (《동아일보》 1932년 3월 20일자.)
일주일 뒤인 3월 24일에 이홍근이 6년형, 유화영을 비롯한 최갑룡, 조중복, 임중학 등이 5년형, 김정희 4년형, 강창기, 안봉연, 韓容基 등이 2년형을 선고받았다. (《동아일보》 1933년 3월 27일자.)
이들은 모두 항소했다. 형량을 줄여보겠다는 기대보다도 서울의 형무소에 가면 독서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계산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261쪽.)
서울에 도착한 일행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면서 사진을 찍었는데, 유림의 사진 촬영일자는 4월 26일이었다. (유화영 신원카드 참조(신원카드에 적힌 그의 주소는 奉天 十官房 商埠地 22經路 367 院內 301號였다)
서울로 옮겨진 직후 안봉연은 고문과 옥고로 인한 폐질환으로 옥사하였다.(무정부주의운동사편찬위원회, 위의 책, 261쪽))
5월 11일에 경성복심법원 형사2부에서 열린 항소심의 판결은 원심과 같았고, (《동아일보》 1933년 5월 12일자.)
이어서 7월 6일에 열린 경성고등법원의 상고심에서는 ‘변호인의 상고가 이유 없다’는 결정이 내려져 원심대로 형이 확정되었다. (京城高法 판결문1933.7.6))
형이 확정된 7월 6일자로 서대문형무소 기결수 감방에 들어간 유림은 1937년 10월 8일 서대문형무소를 출소하였다. (서대문형무소 신원카드.)
만 4년 3개월 만이었는데, 이것은 5년 형기 가운데 미결수로 지낸 기간 270일을 형량에 算入했기 때문이다. (경성복심법원 판결문,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1, 817쪽.
여러 자료들이 그가 5년형을 치르고 1938년에 출옥했다고 기록했는데, 모두 단순히 1933년을 기점으로 5년을 보태서 만든 것 같다.)
겉으로는 그저 5년이지만, 실제 검거된 1931년 10월부터 따진다면 만 6년이나 갇혀 지낸 세월이었다. 그런데 그 동안 오직 서대문형무소에서만 지낸 것은 아닌 것 같다. 동지인 權五惇이 대전 감옥에 가서 그를 만난 일도 있기 때문이다. (권오돈이 대전감옥에서 유림을 두 번째로 만났다고 기록하였고, 또 아들 原植의 병이 중했는데, 일본측이 이를 치료해준다는 미끼를 내걸었지만 전향하지 않고 소신을 지켜나간 일화도 이 당시의 것이다.(權五惇, 旦洲의 生涯와 思想, 旦洲柳林先生紀念事業會, 앞의 책, 148쪽))
즉 서대문에서 대전으로 이감되었다가 다시 서대문감옥으로 되돌아온 뒤 출소한 것 같다.
6. 2차 망명과 임시정부 참여(1937~1945)
출옥한 뒤에 곧 2차 망명길에 올랐다. 1937년 10월에 출소했으니, 대개 그 해 말 정도로 추정된다. 이 시기는 중일전쟁이 일어난 지 석 달이 지난 무렵이고, 11월 16일에 중국국민당 정부가 이미 重慶으로 천도한다는 방침을 결정하고, 12월 13일 수도 남경이 함락되던 그러한 시기였다. 1938년 10월에 중국의 주된 항전 기지인 武漢마저 점령당하게 되자, 전선은 위로 북경으로부터 아래로 정주와 한구, 즉 중국 중부지역을 잇는 선과 여기에서 양자강을 따라 동쪽으로 상해에 이르는 선으로 형성되었고, 그 동북부 지역을 일본이 장악한 형편이었다. 그리고 중국은 1936년 12월 12일의 서안사변 이후 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져 將介石과 延安의 毛澤東이 합작으로 항일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한편 만주에서 활동하던 한국독립운동세력은 격전을 치르면서 약화되고 있었다. 李靑天이 이끌던 한국독립당군은 1934년에 이미 중국관내지역으로 이동하여 한인청년들을 군사간부로 양성하는 사업에 참여하면서 임시정부 주변에 포진하고 있었고, 왕성한 투쟁을 벌이던 조선혁명당군은 1938년 9월에 金活石이 일제에 의해 체포됨에 따라 종지부를 찍는 상황이었다. 이 시기에 유림은 2차 망명길에 올랐다.
유림의 활동 가운데 가장 식별하기 어려운 시기가 바로 2차 망명 시기인 1937년 겨울부터 중경으로 이동한 임시정부에 가담하던 1942년 가을까지이다. 그가 1938년에 瀋陽에서 중형 暾永의 아내, 즉 둘째 형수의 죽음을 애도하여 조카 興植, 廣植에게 보낸 글 한 편 이외에는 그의 행적을 알려주는 직접적인 자료가 없다. 그것은 역시 당시의 상황이 매우 혼란스럽고, 어려웠음을 보여주는 사실이기도 하다. 그는 남북만주를 돌며 재기를 꿈꾸다가 한계를 느껴 중국 관내지역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그리고 북경과 천진 일대에서 한중항일연합군의 조직에 진력했다고 한다. (旦洲柳林先生紀念事業會, 앞의 책, 264쪽.)
하지만 그 사실을 증명할 만한 자료가 없음은 퍽 아쉬운 일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1942년 10월에 중경 임시정부 거리에 그가 나타났다. 일찍이 1920년 여름에 유학을 위해 머물다가 병으로 고생했던 상해, 또 成都에 유학했다가 돌아오던 길에 들렀던 1926년의 상해에서 임시정부를 스쳐 지났던 그가 무려 20년 가까운 세월의 공백을 훌쩍 넘어 그 정부에 참가한 것이다. 만 6년 동안의 구금 생활을 치르고 1938년 만주에서 활동방향을 모색하던 그가 다시 4년이 지난 1942년 10월에 중경에 나타난 것이기도 하다. 도대체 그 과정을 알 수는 없지만, 그가 상당히 고민하고 방황했을 것이라는 점은 쉽게 짐작이 된다. 1940년이면 만주에서 항일전쟁은 사실상 끝난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새로운 근거지를 찾아 나서야만 했다.
그에게 닥친 어려움은 두 가지로 정리된다. 우선 활동의 교두보가 없어져 버린 점인데, 오랜 공백기가 인맥이나 조직 등 활동 터전을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북경을 중심으로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 사이에 주도권 장악 경쟁은 그로 하여금 더더욱 방향 감각 잡기에 어려움을 주었을 것이다. 또 만주지역이나 관내지역의 아나키스트들과도 너무나 거리감이 컸다. 성도 유학시절에 상해에서 결성된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나 이를 이은 남화한인청년연맹, 다시 이를 이은 조선혁명자연맹도 낯선 것이다. 여기에다가 그가 평양으로 가던 시기에 조직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도 참가하지 못한 점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그가 활동하던 바탕이 오직 의성숙(의성학원)을 경영하면서 닦아놓은 것밖에 없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였다. 물론 평양에서 조직한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이 있고, 또 그 차원에서 학교를 경영했지만, 국내 조직도 붕괴되고 투옥생활 동안 만주의 터전도 없어져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두 번째 어려움은 공백기 동안 전개된 상황변화였다. 한인 아나키스트들의 행방이 본연의 이념적인 선을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옥살이하기 직전까지 아나키스트들은 민족주의자나 공산주의와의 결합에 부정적이었다. 앞에서 나온 것처럼,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할 때 이미 그러한 행동 방침을 결정한 적이 있었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獨立運動史資料集 11, 1976, 818쪽.)
그런데 출옥한 그의 눈앞에는 그것과는 전혀 다른 양상, 즉 중국지역의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이 민족전선에 참가하는 방향을 잡고 있던 것이다. 일제의 만주침공과 이를 이은 중일전쟁의 발발은 아나키스트들로 하여금 전면적인 항일전쟁의 필요성을 요구하였다. 그래서 “그 동안 아나키즘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를 배격하던 중국지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1936년 후반부터 민족전선 결성을 제기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호룡, 앞의 글, 186쪽.
柳子明, 鄭華岩, 柳絮, 羅月煥, 李何有 등 중국지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은 남화한인청년연맹을 이어 1937년에 조선혁명자연맹을 결성하고 공산주의자와 함께 통일전선 결성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그 결과 1937년 12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과 함께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하였다.)
더구나 1941년 무렵에는 아나키스트 그룹이 임시정부의 외곽에 포진하고 있었고, 그 계열의 청년들이 1939년에 조직한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광복군의 支隊로 배속되어 활동하고 있었다. (1941년 1월 1일에 광복군 제5지대가 되었고, 다음 해 5월에 제2지대로 편제되었다.)
그러므로 그는 북경, 천진 등 화북지역에서 그의 진로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유림은 중국공산당의 본거지인 延安을 방문했던 것으로 보인다. “旦洲先生에 따르면, 망명중 한 시기에 중국 연안에서 며칠을 머물면서 毛澤東과 많은 것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고 한다” (崔文浩, 編輯後記, 旦洲柳林先生紀念事業會, 앞의 책, 269쪽.)
는 이야기는 한편으로는 이해하기 힘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곳에서 金枓奉을 만났다는 이야기는 당연하다. 이미 1921년 초에 북경에서 한글말본 저술에 몰입하고 있던 김두봉을 도운 인연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김두봉의 저서 《깁더 조선말본》은 1922년에 상해에서 출판되었다.)
유림이 그곳에 도착하던 당시 김두봉은 화북조선독립동맹의 주석이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커다란 변화를 읽을 수 있다. 1929년에 북만주 海林에서 김좌진과 만나 공산주의를 이길 수 있는 사상으로서의 아나키즘을 강변했던 그의 자세에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연안에서 북경이나 만주로 파견되어 있던 조직과 연결되어 그곳을 찾아갔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그래서 중경이냐 연안이냐를 저울질하던 그가 일단 연안행을 택했고, 가서 毛澤東, 김두봉을 만났던 것으로 정리된다. 그렇지만 그는 그곳을 떠났다. 자신의 의지나 방향감각과는 맞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가 연안을 떠나 중경으로 이동한 사실은 그의 사상적인 변화라기 보다는 처해진 상황의 극복을 위한 돌파구 마련이라고 풀이된다. (그가 향했던 방향은 당시 조선민족혁명당의 당군으로 활약하던 조선의용대 구성원의 3분의 2 병력이 황하를 건너 북상한 것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1938년 10월에 무한에서 崔昌益과 許貞淑이 金元鳳을 떠나면서 시작된 조선민족혁명당 소장파들의 연안행은 1941년에 가서 본격화되었다. 먼저 연안에 도착한 최창익이 주도하여 산서성 진동남의 太行山에서 화북조선청년연합회(1940.1)를 결성했고, 이어서 조선의용대 화북지대(1941.7)를 결성했다. 이들 조직은 각각 화북조선독립동맹(1942.8)과 조선의용군(1942.7)으로 개편되었다.)
임시정부가 자리잡은 중경에 유림의 모습이 등장한 첫 기록은 1942년 10월 20일이었다. 慶尙道區議員選擧會에서 유림 등 6명(金元鳳, 李然晧, 金尙德, 李貞浩, 柳林, 韓志成)을 경상도 출신 의정원 의원으로 선출한 것이다. 이어서 24일에는 그에게 당선증이 주어졌다. (국회도서관, 대한민국임시정부의정원문서, 1974, 700~701쪽.)
柳林의 議員當選證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大韓民國 二十四年 十月 二十日 慶尙道區選擧會에서 貴下가
慶尙道區 議員에 當選되었기 玆에 此證書를 交付함
大韓民國 二十四年 十月 二十四日
慶尙道區議員選擧會
會長 金尙德
柳林 貴下
이 명단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이 당시 임시정부는 좌우합작을 이루고 있었다. 1940년 5월에 우파세력이 한국독립당으로 일단 통합했고, 9월에 한국광복군을 결성했으며, 1941년 11월에는 광복을 전망하면서 建國綱領을 마련했다. 당, 정, 군 체제를 갖춘 것이다. 그 주변에 민족좌파 계열인 조선민족혁명당, 공산주의 세력인 조선민족해방동맹, 그리고 아나키즘 계열인 조선혁명자연맹 등이 에워싸고 있었다. 그런데 1941년에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혁명자연맹이 먼저 임시정부에 참여함으로써 좌우합작의 물줄기가 열렸다. 이어서 1942년 5월에 조선민족혁명당이 이끄는 조선의용대가 임시정부의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고, 10월에는 조선민족혁명당이 임시의정원에 참가하였는데, 이로써 좌우합작이 완성된 것이다. 유림은 바로 이 때 중경에 도착하였고, 조선민족혁명당과 함께 34회 임시의정원회의에 참가하는 것으로써 임시정부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유림이 중경으로 갔다는 말은 그도 임시정부에 동참하기 위한 발걸음임을 의미한다. 더구나 도착하고 보니, 이미 조선민족해방동맹과 조선혁명자연맹이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있었고, 또 조선민족혁명당의 참가도 결정된 상태였다. 그러므로 그의 임시정부 참여는 자연스런 일이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임시정부에 합류한 이유에 대해 그는 “독립을 달성하고 이 나라에 아름다운 낙원을 창조하려면, 우선 민족을 대표할 만한 어떤 근거가 있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金在明, 앞의 글, 387쪽.)
이와 함께 그는 민족의 당면한 과제인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현실적인 조직’이 필요하다고 느끼고, 그러한 조직을 ‘전 민족의 자율적 기관’인 임시정부에서 구현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위의 글, 388쪽.)
아나키즘이 사상면에서는 큰 공헌을 하면서도 현실면에서는 패배를 거듭해 왔던 것을 자인하면서, 민족의 당면 과제인 자주독립국가를 건설하려는 마당에는 ‘현실적인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기도 했다. 즉 유림은 식민지시대에 그러한 조직을 임시정부에서 구현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대표 자격으로 ‘전 민족의 자율적 기관’인 임시정부에 참여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金在明, 앞의 글,)
그의 임시정부 참가는 또한 당시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인식 변화를 증명하는 셈이다. 柳林과 柳子明이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과 조선혁명자연맹의 대표로서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유림은 외교연구위원회 연구위원, 선전위원회 위원, 건국강령수개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약하였고, 歐陽軍은 광복군총사령부 서무과 과원, 安偶生은 주석판공비서 겸 선전위원회 위원으로 활약하였다. (이호룡, 앞의 글, 191쪽.)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정부, 국가와 조직원칙, 그리고 군대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아나키즘의 逸脫을 의미한다. 정부와 국가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민족전선론의 단계혁명론적 측면에서 비롯되었다. 즉 재중국 한국인 아나키스트들의 민족전선론은 민족해방을 당면 최고목표로 설정하고 모든 힘을 항일전쟁에 집중해야 한다고 하는 단계혁명론에 입각하고 있었고, 그러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한 국가와 정부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호룡, 위의 글, 193쪽.)
그래서 유림도 “각자의 주의 주장을 일시 보류하고, 덮어놓고 일치단결하여 독립이란 산을 넘은 후에 다시 각자의 주의를 위하여 매진하자”하여, (《조선일보》 1945년 12월 7일자.)
1차적으로 민족혁명 완수가 급선무라고 주장하였다. 즉 민족혁명을 이루기 위해서는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무조건 단결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각자의 주장을 일단 접어두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호룡, 앞의 글, 193쪽.)
그가 임시정부에 참여하면서 ‘一個民族, 一個政府, 一個理念, 一個集團’과 “黨派는 合同聯異, 정부는 共戴均擔”이라는 구호를 내세웠다고 전한다. (旦洲柳林先生紀念事業會, 앞의 책, 264쪽.)
앞의 주장은 통합의 원리요, 뒤의 것은 운영의 논리이다. 즉 임시정부를 중심에 두고, 이를 중심으로 뭉쳐야 하는 통합의 원리를 내세운 것이고, 다음에는 통합을 바탕으로 공동으로 정부를 운영해 나가자는 주장을 내세운 것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유림이 구상하였던 정부도 “통치권을 행사하는 정부가 아니고 혁명의정원과 혁명정부”였으며, (국회도서관, 앞의 책, 404쪽.)
독립을 달성하고 삼천리 강산에 아름다운 낙원을 창조하기 위한 근거로서의 정부를 구상하고 있었다. (《조선일보》 1945년 12월 7일자.)
유림이 임시정부에 합류한 첫 걸음이 의정원 의원이었다는 사실은 이미 앞에서 언급하였다. 당선증을 받은 다음날, 즉 1942년 10월 25일부터 시작된 제34회 의정원회의에 출석하는 것으로 그의 공식적인 활동이 시작되었다. 이후 1945년 12월에 귀국할 때까지 그의 활약은 크게 정부차원과 비정부차원의 일로 나누어 정리된다.
정부차원의 활동은 임시의정원 의원 활동과 국무위원 활동이 있다. 의정원에서 끄집어낸 첫 문제가 아나키스트 나월환 암살 용의자들의 처리에 대한 그의 강경한 발언이 주목된다. 1942년 10월 31일과 11월 2일에 나월환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국회도서관, 앞의 책, 289~301쪽; 《우리 通訊》6호(1942.11.2)(한시준 외, 中國內韓國近現代關係資料, 국사편찬위원회, 1998, 28쪽)
나월환은 1912년 나주 출신으로 일본에서 흑우연맹에서 활약했고, 중국으로 가서 황포군관학교 8기(중앙군관학교 8기)로 졸업했으며,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입했다. 중국군 헌병대에 복무하던 그는 1937년에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본국으로 호송되던 중 靑島에서 탈출했고, 1939년 11월 11일에 결성된 청년전지공작대의 대장이 되어 서안으로 갔고, 이것이 광복군 제5지대가 되면서 지대장이 되었는데, 1942년 3월 1일 부하들에 의해 암살되었다.)
즉 임시정부가 나월환을 암살한 주모자들을 사형에 처해 달라고 중국국민당정부에 요청했다는 소문의 사실 여부를 캐묻고 나선 것이다. 아나키스트인 암살 용의자들을 극형에 처해서는 안 된다며 救命을 요구하는 강한 의지를 털어놓은 것이다. 다음 해인 1943년(49세) 2월 16일부터 외교위원회의 연구위원이 되었고,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4, 1972, 859쪽.
외교위원회 연구위원으로서 유림의 이름은 1944년 6월까지 확인된다.(같은 책, 986쪽))
이어서 그 해 4월 10일에 임시정부에 선전부가 만들어지면서 趙素昻, 申翼熙, 嚴恒燮 등 14명과 함께 선전위원회의 선전위원으로 활약했다. (위의 책, 876쪽.)
4월 11일 현재 경상도 의원(김약산, 유림, 김상덕, 李然皓, 이정호, 장건상), 그리고 그 해 10월에는 35차 의정원 회의에 다른 의원 17명과 더불어 임시헌장 修改案을 제출하였다. (위의 책, 997쪽.)
1944년 4월에 그는 국무위원(무임소)이 되었고, (1944년 4월 24일에 주석 중심제가 주석?부주석제로, 6~10명의 국무위원 정수가 8~14명으로 각각 바뀌었다.(위의 책, 1009쪽))
이듬해 12월에 귀국할 때까지 국무위원으로서 활동을 계속했다. 그러면서 그는 이때 열린 36차 의정원회의에서 의원으로서 임시헌장을 통과시키는 데 참여하였다. (국회도서관, 앞의 책, 383~385쪽.)
당시 의정원 회의록에 남아 있는 그의 발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1945년 4월 11일에 37차 의정원 개원식과 겸해 열린 임시정부, 임시의정원 수립 26주년 기념식 축사이다. 그는 축사에서 정부와 의정원이 3·1운동의 결실로 만들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독립운동과 한 덩이가 되지 못했다고 지적하고, 이제 임시정부에 총집중해야 한다고 했으며, 이어서 정부와 의정원이 시대의 변화에 맞게 고쳐져야 하고 구성원들도 목전의 임무를 위해 특권을 요구하지 말고 3·1운동 당시처럼 자유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위의 책, 404쪽.)
이처럼 임시정부에서의 단주의 주장은 항상 광복 전열의 통합과 운동 역량의 집중 및 자유연합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는 국무위원이면서 아울러 김상덕, 안훈과 더불어 임시의정원 제1분과(법제) 소속 의원이기도 했다. (위의 책, 408쪽)
1945년 4월에 시작된 38차 의정원회의에서 5월에 편제 개편이 있게되자, 조소앙, 엄항섭, 안훈, 차리석, 박건웅, 손두환 등과 더불어 제1분과(법률, 청원, 징계) 소속으로 활약하였다. (《앞길》42기, 1945년 6월 1일자.)
그리고 해방 직후 8월 17일부터 열린 제39차 의정원회의에서는 김붕준, 성주식, 조소앙 등과 함께 국무위원으로서 입국 이후 국민에게 정부를 내놓을 일에 대해 적극적인 논의를 펼쳤다. (국회도서관, 앞의 책, 549쪽.)
유림은 비정부 차원의 활동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 대표적인 예로 1943년 5월 10일에 중경에서 열린 재중국자유한인대회에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대표로 참가했던 경우를 들 수 있다. 당시 미국과 영국의 영수가 워싱턴 회담에서 戰後 한국을 독립 이전에 국제 감시 보호 아래 두기로 했다는 보도가 전해지자, 중국에 있던 각 당파 대표자를 중심으로 동포 3백여 명이 중경에서 대회를 열고 “한국은 완전 독립하여야 한다. 외국의 어떠한 간섭이라도 반대한다”는 요지의 강연과 토론을 가지고, 4개항으로 된 선언을 발표했다. 이 때 유림은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의 대표로서 한국독립당의 洪震, 조선민족혁명당의 金忠元, 조선민족해방동맹의 金奎光(星淑), 한국애국부인회의 金淳愛, 한국청년회의 韓志成 등과 더불어 주석단의 한 사람으로 추대되어 활동하였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4, 1032~1033쪽.
양우조의 아내 최선화는 이날 장면을 “‘한국은 전쟁 후에 (국제; 필자 주)공관이 된다’는 문제로 자유한인대회가 오후 2시에 중경 근방에 있는 신운복무사 회집실에서 개최되었다. 모였던 사람은 한 이백 명쯤 될까?”라고 기록하였다.(양우조, 최선화 지음/김현주 정리, 제시의 일기, 혜윰, 1999, 209쪽))
이외에도 민간인 기구인 中韓文化協會에도 관여한 것으로 보인다. (《重慶大公報》 1945년 3월 2일자.)
유림은 임시정부 요인들이 귀환할 때 제2진에 속했다. 주한 미군사령부가 보낸 비행기를 타고 上海를 출발한 일행은 1진(11월 23일) 보다 8일 늦어 12월 1일에 도착하였는데, 마침 악천후로 서울 비행장에 착륙할 수 없어 군산을 통해 귀국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그런데 2진 일행은 그를 포함하여 洪震, 曺成煥, 趙素昻, 金元鳳 등 15명의 정부 주요 인물과 安偶生을 비롯한 9명의 수행원으로 구성되었다. (旦洲柳林先生紀念事業會, 앞의 책, 70쪽.)
7. 맺음말
단주 유림은 성장과정에서 때 마침 안동에 들이닥친 계몽운동의 물결에 직접 영향을 받으면서 민족문제에 눈을 떴다. 柳寅植은 그 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이다. 3·1운동에 참가한 뒤 만주로 망명한 그는 1920년 여름에 유학차 상해로 이동하고, 북경을 오르내리며 신채호와 김창숙의 영향을 받았다. 특히 아나키스트로 변신하던 신채호로부터 영향을 받아 그도 아나키즘에 開眼하였다. 새로운 사조에 접하던 그는 홀연히 중국대륙의 깊숙한 내륙에 자리잡은 成都로 유학 갔고, 영문학을 전공하고 다양한 외국어를 습득하였다.
유림은 신지식으로 무장하고서 내륙 여행을 거쳐 만주로 돌아와 방향을 가늠하였다. 잠시 신민부를 찾아 김좌진과 공동노선을 모색해 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와 국내에서 열린 전조선사회운동자대회에 참석했다가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는 실적을 올렸다. 사범대학 영문과 졸업생으로서, 아나키스트로서, 그리고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 차원에서 義誠塾(의성학원)을 경영하던 그가 일제 경찰에 검거되고 5년형을 받아 모두 6년 동안 구금 또는 옥중생활을 보냈다.
중일전쟁 직후에 풀려난 그는 활동 근거지를 상실 당한 채 앞길을 가늠하다가 연안을 거쳐 중경으로 이동하였다. 임시정부에 참여하여 의정원의원으로, 국무위원으로 활약하다가 해방 후 환국하였다.
일제강점기의 유림의 독립운동은 세 가지 특성을 보였다.
첫째, 그의 활동이 화려한 면이 없는, 항상 주변부적인 색채를 나타냈다는 점이다. 물론 아나키즘 자체가 항일투쟁의 핵심세력으로 자리잡지는 못했지만, 그것보다도 그는 아나키즘운동사에서조차 핵심부에서 벗어나 바깥을 도는 듯한 인상을 주었다. 북경에서 아나키즘운동이 한국독립운동가들 사이에 불길처럼 타오르기 시작할 때 그는 성도대학으로 유학 갔고, 그 때문에 상해에서 1924년에 조선무정부주의연맹이 조직될 때에도 참여하지 못했다. 1927년에 해림에서 재만조선무정부주의연맹이 조직될 때에도 그는 여기에 빠져 있었다. 김좌진과 담판을 벌이다가 그가 돌아온 직후에 그 단체가 결성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가 1929년 10월 평양으로 잠입하여 전조선흑색사회운동자대회에 참가하고 비밀리에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는 데 핵심이 된 점이나, 그 차원에서 교육사업을 벌인 점은 거의 유일한 주역으로서의 활동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1931년에 검거됨으로써 사실상 막을 내렸다. 또 출옥 이후 연안을 거쳐 중경으로 가서 임시정부 국무위원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것도 한국독립당이나 조선민족혁명당이라는 중심세력에 가려 소수 그룹의 대표로서 가지는 한계를 안고 있었다.
둘째, 그는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상당히 부정적이었지만, 이에 반해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항상 결합의 가능성을 보였다. 그의 눈앞에 좌우 분리가 확실하게 나타난 시기가 성도대학을 졸업하고 상해?북경?봉천 등 활동근거지로 돌아온 직후였을 것이다. 이 때 김좌진을 만나 공산주의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아나키즘을 강하게 주장한 점이 이 주장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이다. 평양에서 결성한 조선공산무정부주의자연맹의 행동방침에서 공산주의와 민족주의를 모두 부정하여 제3의 길을 찾고 있었지만, 출옥 이후 그는 비교적 민족주의 세력이 강하게 자리잡은 중경의 임시정부를 활동지로 택하였다.
셋째, 그는 아나키스트로서 국가기구를 부정하는 인물이었지만 대다수의 한국인 아나키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점차 국가기구를 인정하고 거기에 참가하는 길을 걸었다. 상해에서 활동하던 아나키스트들이 1930년대 초반부터 이미 임시정부와 연결을 가졌고, 더욱이 1930년대 중반이면 좌우합작운동, 혹은 통일전선운동에도 참여하기 시작했으며, 결국 1940년대에는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사상적으로는 ‘일탈’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변화였고, 제3의 길을 내세우는 자존심을 포기한 형국이기도 했다. 그런데 유림은 오랜 옥고기간 뒤에 이미 한국아나키즘운동의 대세가 임시정부를 인정하고 합류하는 현상을 눈앞에 보게 되고, 끝내 여기에 동참하게 된 것이다. 중국관내에서 활동하던 다른 한인 아나키스트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변해 갔다면, 그의 경우는 옥중생활이라는 공백 이후에 망연자실할 정도로 변한 세태에 한 동안 충격을 소화해 나가는 기간이 필요했고, 그 과정이 1938년부터 1942년 사이라고 생각된다. 그리고서 ‘무정부주의’라는 말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임시정부에 대해서도 “기미운동 때에 민족의 총의로 출발한 임시정부이니, 그 정부가 해외에 망명했다가 환국한 것뿐이다”라고 표현하게 된 것이다. (《동아일보》 1945년 12월 12일자.)
유림의 행적을 뒤쫓으면서 아직 많은 문제를 풀지 못하는 한계를 절감한다. 북경시절, 성도대학 시절, 졸업 직후 광동 노동자운동 관련 내용, 출옥 이후 중경 도착 이전 4년 동안의 행적 등은 오리무중처럼 여겨진다. 다음 기회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