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단주 유림 선생 추도문


君在大韓重 君去大韓空

그대 있어 이 나라가 무겁더니 그대 떠나니 이 나라가 비었구나

장례위원장
김 창 숙 (성균관대학교 초대총장 겸 성균관 초대관장)

생사 유명이라 인력으로 어찌 할 수는 없다지만 때로는 노천의 가혹한 처단이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이번 단주 유림옹의 서거만 두고 볼지라도 이런 참혹한 일이 또 어디있겠습니까.
내가 단주옹의 부음을 듣자마자 아무리 병중이라지만 한 달음에 달려가 옹의 유해를 보았습니다. 아! 믿어지지 않는 참혹한 현실이여!
나는 내가 죽은 것보다 더 놀라서 그만 앞이 캄캄해졌습니다. 나는 얼마동안 의식을 잃고 있었습니다. 나는 단주옹의 유해를 부둥켜 안고 한바탕 통곡을 하고 있었음을 그제야 깨달았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디 이럴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대한나라가 왼통 텅 비인 것만 같습니다.

단주옹이야말로 티끌 하나 섞이지 않은 애국지사였습니다. 일찍이 권력에나 금력에 흔들리지 않고 철석같은 절조가 높으신 개결한 분이었습니다. 혹자가 그분의 성격이 괴벽하다고 말을 하지만은 그 결점이 바로 그분의 장점이었습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한광이 추상같은 고고한 절조가 나올 수 있겠습니까. 나는 현대에 있어서 그러한 분으로는 오직 한 분이신 옹을 충심으로 경모해 왔던 터이었습니다.
이 어지러운 세상에 그러한 분이 하루라도 더 살어 계셔야 할터인데 이제 가시다니 차라리 내가 죽고 못 당할 노릇입니다. 나는 돌아와서 즉시 다음과 같은 만장을 읽어보았습니다.

平生唯一友, 磊落柳林翁, 君在大韓重, 君去大韓空,
君是天下士, 無乃去蹈東, 蹈東忽無跡, 百世獨淸風

평생 유일한 친구인 단주옹이여
그대 있어 이 나라가 무겁더니
그대 떠나니 이 나라가 비었구나

그대는 바로 천하의 선비일지니
문득 자취조차 사라졌으나
영원토록 홀로 맑은 바람이어라

적광의 진혼 <寂光의 鎭魂>

구 상 시인

북극성과도 같은 고절이었다. 단주, 당신이 지녔던 그 인류적 이상이나 민족적인 소망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인류해방을 향한 열정이요, 의지요, 혼신이었다. 이러한 고매정신에 뒤따르는 인격적 결백이 당신의 생애를 신산으로써 결정지었고 이제 우리에게도 비통과 억울을 자아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의 시신을 놓고 어떤 학구 한 분은 이렇게 단정하였다.
‘이 땅에 주의자(?) 하나가 마지막 갔구료, 이제 우리 정치가들은 형이하학적인 속물만 남았어!’
실상이지 당신이 신봉하던 <아나키즘>이 역사적 구현성을 갖든 못갖든 그 이념에 있어 세계사상적인 열망을 부동하게 갖던 지도자가 그 누구였던가? 어떤 노지사는 넋두리를 퍼부었다.
‘일찌기 자식들에게 독립이니 애국이니 하지 말라고 유언을 해야겠어! 내남없이 이 말로, 이 꼴을 당하고야 누가 자기희생을 하겠느냐 말이야.’
폭언이라면 폭언이다. 그러나 광복후 그들이 걸어온 현실생활의 격란을 짐작하는 자라면 이 자조적 언사에 대구를 못할 것이다. 6·25 사변후 작금까지 대구 북성로 3층 마루방에서 삼동에 화기 하나 없이 자취를 하시던 단주, 당신의 면영이 눈 앞에 시방도 선한 까닭이리라.
또 어떤 젊은 동지는 아픔에 차서 하소연한다.
‘이제는 꾸중들을 사람이 없어졌어요. 선생님께 한 번 당하고 나면 뼈속까지 아프던데요’
이 토정에는 선배노인들도 동조하는 것이다.
‘그래! 단주가 가고 나면 싸울 사람도 없어 성미가 웬만 해야지’
호상객 전원이 끄덕이었다.

단주, 당신의 그 선지적인 식견은 우중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었고, 수많은 일화로 수 놓은 결벽은 범접을 용허치 않았다. 그래서 당신의 고절은 이제 더욱 빛나기도 한다. 타세하시기 전일만 하여도 당사에서 어떤 동지 하나를 붙들고 혁신계 통합에 언급하시기를,
‘반보수란 하나의 구실만으로 야합하자는건 난 반대야 <반팟쇼> <비마르크시스트>로써만 모여야지, 정치라는 건 뭉치는 게 제일이 아니라 그 이념과 거기에 따르는 작풍이 문제야’
그 냉엄에 차고 상기된 표정으로 질책하시더라는 것이다. 오늘날 정치인들의 의식과 작풍을 바라볼 때 보수든 혁신이든 우리는 그 속에서 전근대적인 감촉을 금할 바 없다. 이러한 기색할 사회 속에서 당신은 어쩌면 살수차와 같은 청량을 우리에게 부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영광스럽기까지 하던 당신의 고독마저도 가고
우리에게 그 적막을 파장시킨다.
아니, 이러한 당신의 적광이
모든 이의 가슴에 부서지고 대응되는 것만이
당신에게 향한 애도가 될 것이다.
북극성!
당신의 망령은 저 별처럼 이 땅에 진좌하여지라.

단주 유림-서릿발 같은 절개 <旦州 柳林-서릿발 같은 節槪>

‘월간 독립기념관’ 1988년 7월호 - 구 상 시인

나는 해방후 60년대 초반까지 언론계에 몸담고 있었기 때문에 국외에서 활약하다가 귀국한 독립운동가나 투사 또는 국내에서 옥고를 치르고 나온 독립지사나 애국자들을 공사간에 비교적 많이 만나 뵐 기회를 가졌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내 뇌리에 가장 강렬하게 남아있는 한분을 쳐들라면 단연 단주 유림(旦洲 柳林) 선생이라 하겠다.

그것은 내가 선생이 독립운동가로서의 경력이나 업적에 대한 비교평가에서라기보다 6·25동란중 피난지 대구에서 우연히 지우(知遇)를 얻을 때마다 선생의 고매한 인품에 접했을 뿐만 아니라 그 청빈, 아니 적빈(赤貧)의 생활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사상이나 지조는 둘째로 하고 그때 그들의 생활을 우선 소개하면 선생은 대구 옛 역사(驛舍) 앞 북성로(北城路)에 있는 일본식 목조건물 3층 마루방에서 겨울에도 불기하나 없이 홀로 사셨는데 언제 가서 뵈오나 외국의 사상서적들을 읽고 계셨다.

선생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무위원의 한분이었음은 기록으로 다 아는바이지만 선생은 단순한 독립운동자가 아니라 아나키즘이라는 인류적 이상과 세계관을 지니고 또한 그 구현에 열정을 갖고 헌신하는 사상가였으며, 연보에 의하면 선생이 30대 전후 만학이지만 당시 중화민국 국립대학인 성도(成都)대학 재학시절 “인류의 평등과 자유와 우애”를 주장하는 이 세계관에 심취하게 되었다고 전하는데 여하간 선생은 귀국하여서도 시세(時勢)에 일체 편승함이 없이 바로 이 이념을 내세워 독립노농당(獨立勞農黨)을 조직하였으며 숨떨어지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이를 견지하셨다.

내가 선생이 받아 주시는 것을 기회로 어떤 때는 술을 먹고 가 대접하며 취중에 무례하게도
“무정부주의 사상은 공상이나 환상입니다”
하고 공격을 할라치면 선생은
“그 무정부주의란 일본사람들의 오염이야! 아나키즘은 바로 자유민주주의지. 그래 자유민주주의를 마다하는 시인도 있단 말인가?”
라고 말씀하곤 하였다.
실로 나에겐 주위에서 보기에도 예외리 만큼 관대하셨기 망정이지 다른 사람 같으면 불호령이 떨어지고 당장에 축출을 당했을 언동이었다. 왜냐하면 선생은 자신의 사상이나 신념에는 완고하리만큼 확고부동하여서 양보나 타협이란 도저히 있을 수가 없고 비정(非情)하다리만큼 냉엄하셨다. 당시 내가 직접 겪은 또한 예로는 그것이 53년인가 휴전후인데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 선생이 대구에 오셔서 신문사로 나를 찾으셨는데(당시 나는 영남일보 주필겸 편집국장으로 일했음) 나보고 단주(旦洲) 선생 거처를 안내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모시고 가니 두분께서는 반갑게 담소를 하시다가 해공 선생이 무슨 말씀 끝에
“단주도 이렇게 골방에 틀어박혀 있지만 말고 현실에 나와 나랑 함께 일하세”.
하고 위로와 권고가 포함된 이야기를 하자 단주선생은
“임자나 이승만의 첩살이(국회의장을 한다는 뜻-필자)를 하면 했지! 왜 멀쩡한 사람을 욕보이려 들어”
라는 일갈이었다. 그 자리는 해공선생의 그 유연한 기풍과 호탕한 웃음으로 무사히 끝났지만 선생의 그 기품과 도도함이 이럴 정도였다.

선생의 이러한 서릿발 같은 절개의 일화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중 바로 아드님 유원식(柳原植: 5·16 혁명 국가 재건 최고회의 재정경제위원장) 장군과 관련된 한두가지를 쳐들면 1929년초 선생은 사명을 띠고 입국하였다가 대전에서 체포되어 대전감옥에 갇히게 되시는데, 원식씨도 함께 구금되었다가 폐결핵의 증세로 보석이 되어 어느 절간에서 요양을 하게 되었다. 이런 부자의 사정을 동정해서인지 또는 그들의 정책에서인지 일본형리(刑吏)는 교회사(敎晦師)를 시켜 선생을 회유하기를
“아드님의 병을 고치자면 아버지가 나가야 하니 앞으로 독립운동에서 손을 떼겠다는 서약서를 쓰라. 그러면 즉시 가석방을 할 것이다.”
라고 하자 선생은
“나는 아무리 자식을 살리기 위하여서라도 거짓을 저지를 수는 없다.”
고 단연 거부하셨다는 이야기를 당시 바로 그 감옥에 함께 있던 고 권오돈(故 權五惇:전서울대학교수) 선생이 <단주의 생애와 사상>이라는 글에서 증언하고 있다
바로 그 아드님 원식씨가 그뒤 만주에 가서 자기 나름의 포부에서 만주군장교가 되었다가 일본군에도 관련했었다고 해서 해방후 귀국해서도 선생은 눈 감으실 때까지 상면을 안하신 일은 선생을 아는 사람이면 다 아는 일이요, 또
바로 그 원식씨가 혁명준비를 완료한 후 아들 능희(陵熙-선생의 손자)를 보내어 군부거사를 알린 즉,
“그건 안된다. 그것은 결국 군사독재정권으로 전락하는 것이 고작이다”
라고 질책하였다는 이야기가 원식씨의 유저 ‘혁명은 어디로 갔나?’에 밝혀져 있다.

이렇듯 선생의 지조는 범접을 불허하는 고매하고 개결한 것이어서 민족절개의 사표로 추앙받는 고 심산 김창숙(故 心山 金昌淑)선생같으신 분도 선생의 서거를 애도하여,
“단주옹이야말로 티끌 하나도 섞이지 않은 애국지사였습니다. 일찍이 권력이나 금력에 흔들리지 않고 철석같은 절조가 높으신 개결한 분이었습니다. 어떤이는 그분의 성벽이 괴벽하다고 말을 하지만은 그 결점이 바로 그분의 장점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겨울 하늘에 서릿발 같은 고고(孤高)한 절조가 나올 수 있었겠습니까? 나는 현대에 있어서 그러한 분으로는 오직 한 분이신 단주옹을 충심으로 경모해 왔던 터입니다.”
라고 추모사를 쓰시고 덧붙여

그대 있어 이 나라가 무겁더니

그대 떠나니 이 나라가 비었구나.

(君在大韓重 君去大韓空)


그대는 바로 천하의 선비일지니.

영원토록 홀로 맑은 바람이어라.

(君是天下士 百世獨淸風)

라고 읊으셨다.
나도 선생의 영결식에서 조시(弔詩)를 읽었었고 선생의 영구를 모셔다 산소무덤에 묻고, 흙을 덮고난 후 음복을 하면서 여러 사람들이 자기다운 추모의 술회들을 하는 것을 들었는데 지금도 뒤에 쟁쟁하게 들리듯 하는 것은
“이제는 꾸중다운 꾸중을 들을 데도 없어졌어! 한번 당하고 나면 뼈속까지 아프더니.”
하는 개탄이었다.

선생께서는 1961년 4월 1일 이승을 떠났으니 어느덧 스물일곱해나 된다. 그러나 선생의 모습을 떠올리면 오히려 천년전 설화 속에 나오는 인물같이 아득한 느낌이 드는 것은 오늘날 물질위주의 기능사회 속에서 선생같은 인간으로나, 사상적으로나 그렇듯 거창하고 고고(孤高)한 인품을 도대체 찾을래야 찾아 볼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직 이 독립기념관에 깃들어 있을 선생의 그 넋을 기리며 이런 추억이나마 더듬어 보는 바이다.

단주의 생애와 사상 <旦州의 生涯와 思想>

권 오 돈 서울대 교수

인간의 사회에서 가장 귀중하고 영원토록 불후불멸되는 것이 세가지 있다고 합니다. 덕행, 공업, 사상, 이 세가지인 것입니다. 이 중의 어느 하나라도 위대한 경지에 도달하면 그것은 불후불멸되고 영원토록 전하여지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가 어느 하나 수월한 것이 있겠습니까만은 이 중에 가장 형극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 사상입니다. 우리는 과거 얼마나 많은 사상의 선구자가 고난의 길을 걸었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상은 사상으로서 존재해 있는 것이 아니오, 그것을 실현시키려는 열의가 부수되는 까닭입니다.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모여 추모하여 마지못하는 단주 유림선생도 이 사상의 선구자이시며 형극의 길에서 고(苦)와 난(難)을 맛 볼대로 맛 보신 분입니다.
선생은 독립운동자이십니다. 많은 독립운동자가 겪어온 그 고난은 물론 다 겪으셨습니다만은 선생의 독립운동은 단순한 민족적 독립운동만이 그 목표가 아니었던만치 다른 운동자로서 겪지 못한 고난까지 겪으셨습니다. 선생을 가르키어 <아나키스트>라고 세상에서 지칭하고 또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라고 역칭합니다. 그러나 선생은 무정부주의자가 아닙니다. 아나키즘을 무정부주의라고 번역한 것은 몰이해한 일본 사람들의 오역입니다. 선생은 자유민주주의라고 말씀합니다. 나도 여기에 찬성하는 사람입니다.
선생의 자유민주주의는 일민족의 자유와 평화는 물론 전세계 인류의 자유와 평화와 우의를 목표로 하는 주의입니다. 이 나라에 태어나신 선생임으로 또 이 나라의 이 민족이 마침 일본제국주의의 강제예속되었던 시기이었던만치 이 민족의 해방을 민족의 자유를 찾기 위하여 먼저 헌신노력하시었을뿐 선생의 사상의 근본목표는 전인류의 해방이었습니다. 그럼으로 선생의 고난은 보통 독립운동자의 그것보다 더 크고 컸던 것입니다. 해외에 망명하시었다가도 위험을 무릅쓰고 고국으로 잠입하여 동지들을 지도하시던 것도 선생이 단순한 독립운동자가 아니신 까닭이며, 그 위대한 사상을 실현함에는 어떠한 고난이라도 감수하시겠다는 비장한 결의가 있으셨던 것이니 ‘예수’가 아시면서 십자가를 등지신 그 결의와 공통되는 것입니다.

내가 선생을 처음 보인 것은 1926년 겨울 봉천에서였습니다. 그때에 선생은 성도사범대학을 마치시고 회천의 기회를 대기하시며 잠시 부인이 경영하시는 여관에서 휴양하시든 때입니다. 그때에 선생은 삼십삼세, 이제 사상적으로 원숙한 지경에 도달하시는 시기이었습니다. 처음 보인 나는 그 선생의 위연한 풍모와 고매한 이상에 감화되어 우리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를 받들게 된 행복감에 가슴이 뛰던 것을 지금도 잘 기억합니다. 그 후 나는 상해로 내려가고 선생은 동만으로 가시었다가 다시 국내로 들어오시었고, 일단 한 번은 탈출하시었으나 또다시 입국하여 필경은 일경에게 피검되어 무수한 고초를 겪으시었습니다.

내가 두 번째 선생을 만나 보인 것은 대전감옥에서였습니다. 물론 형리의 감시가 엄중하여 인사 한마디 똑똑히 못하였습니다만은 그 때의 나는 다시 경복하여 마지못할 일을 선생에게서 보았습니다. 선생의 독자인 원식군이 그때에 같이 옥중에 있다가 폐병의 중태로 보석되어 어느 산사에서 요양하게 되었습니다. 그때에 일형리는 교회사라는 자를 시켜 선생을 불러 내어서 원식군의 병이 중태임을 말하고 그 외아들의 치료를 위하여 가석방하여 주겠으니 다시 이런 일을 않겠노라는 서약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때에 선생은 언하에 거절하시었습니다. 내 자식이 죽더라도 독립전선에서 죽는 것이니 저로서는 본망일 것오, 나는 나가면 또 반드시 그 운동을 계속할 것이니 자식을 팔고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선생의 이 숭고한 인격에 감복한 교회사라는 자도 당신이 나가서 또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이곳을 벗어나가려는 방편으로 말만 안한다고 하라는 것이었으나 선생은 비록 일시방편으로라도 거짓말을 할 수 없다, 바른 말하고 죽을지언정 거짓말하고 나갈 수 없다고 준거하시었습니다.
참으로 보통사람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정하고도 위대한 선생의 인격의 발로입니다. 이 반세기동안 우리민족의 광고의 수난기이었으니만치 이 민족의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궐기한 위인열사가 배출하였습니다만은 이 중에서도 가장 탁월하고 위대한 지도자라고 선생을 숭배하는 이유가 이 선생의 인격에 있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 가장 당연하면서도 가장 어려운 것은 내가 품어 가진 사상에 충실하여 담전고후나 좌고우면이 없이 용왕매진하는 것입니다. 천만인이 무어라고 하더라도 내가 가진 사상이 이 민족 이 인류를 위하여 최선의 것이라고 믿을진대 불요불굴 굽히지 않고 나간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면서도 지극히 어려운 일이니, 있다면 그는 천만인 중 하나 쯤이나 있는 위인인 것입니다.

단주선생은 그의 품어 가진 자유민주주의가 이 민족 이 인류의 자유와 평화와 우애 있는 서로 도웁고 서로 붙들어 주는 사회가 되는 사상임에 조금도 틀림없다고 굳게 믿어서 조금도 양보없이 굽힘없이, 곁눈 한 번 떠 본 일 없이 매진하신 분입니다. 이 사상을 위하여는 아무런 희생도 아무런 박해도 일고하지 않으시었습니다. 이 사상을 굽히어야 하는 양보나 타협은 절대로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완고하다고 하리만치 확고부동이었습니다. 파리에서 열린 세계자유민주주의자대회에서 선생에게도 초청장이 왔었지만은 이승만에게 여권부탁으로 찾아 보기를 거부하는 통에 그렇게도 가고 싶으시던 파리도 부지일소하고 말으시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다섯 번이나 문하에 거절 당한 사람입니다. 누구에게나 사상에 충실하면 동지로 허하지만 조금이라도 사상에 위배되면 아무리 평소에 친하던 동지라도 용서하지 않으시던 선생입니다. 이렇게도 사상에 용왕매진하시는 분은 내가 감화받은 선배중에서는 오직 선생이 있으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선생의 생애도 어느 선구자보다 못지 않게 더욱 고난의 형극로를 걸으시었던 것입니다만은 선생의 사상이신 그 자유민주주의는 이제 새 세대의 각광을 받고 새 나라 건설의 새 이념으로 만민의 숭앙을 받게 되었습니다.
선생께서도 지하에서 완이하게 웃으시며 명목하시리라 삼가 믿는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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